◎ 본문말씀: 행 19:1-7

 

오늘 본문은 바울이 윗 지방(브루기아)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해서 경험하게 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원래 에베소에는 아볼로라는 유대인 성경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으며,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으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행 18:24-25). 그의 가르침을 듣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를 데려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가르쳤고 그래서 아볼로는 아가야(고린도)로 건너가 그 부부에게 배운 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대중 앞에서 담대히 전했다(행 18:28)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는 아볼로가 고린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둘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거기서 어떤 “제자들”(일반 크리스천들)을 만나 교제를 하는 중에 그들의 성경 이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다(19:2). 그들은 놀랍게도 “우리는 성령이 계신다는 것도 모른다.” 고 대답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한다. 바울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소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이 성령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일이 가능한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롬 8:9) 바울은 이들의 신앙 상태가 극히 의심스러웠고 그래서 성령과 세례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고 이 “제자들”은 누구인가? 학자들은 이들이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그리스도의 바른 복음을 듣고 배우기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구약 성경에 능통했고 구약 시대를 종결짓고 신약 시대, 복음 시대의 문을 연 세례 요한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세례 요한이 가르 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주목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에게 참 복음, 전(全)복음 순(純)복음을 전했고, 그길로 그는 곧 바로 고린도로 건너가 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해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남겨놓은 제자들은 바울이 도착했을 때 세례 요한까지만 알고 있었고 성령에 대해 듣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세례 요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한은 자신의 물 세례는 예수님이 오셔서 주실 성령 세례를 예고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세례는 아는 데 성령 세례, 성령님에 대해 모른다는 건 요한의 세례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게 될 성령 세례의 예표였음을 가르쳤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참 진리, 바른 복음, 전 복음에 반응해 그 자리서 세례를 받았고 그 수가 12명 쯤 되었다. 바로 이들이 “에베소의 12제자”인 것이다.

 

선교는 신학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선교는 선교사가 속한 나라의 계몽된 문화를 선교지 사람들에게 이식하는 것도 아니다. 선교는 성경공부를 시키는 것도 아니다. 선교는 복음인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이요 알게 하는 것이요 믿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에게 반응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순종하게 k하는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샘이나 우물을 파주고 집을 지어주는 것도 만역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선교가 아니라 선교사 개인의 업적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은 에베소에 가서 다른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Artemis) 신전을 돌며 그 신전이 무너지기를 기도하며 여호수아 기도회나 땅 밟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항구도시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아시아의 보고로 불릴 만큼 번창해 각종 미신들과 이방 종교들과 사회적 병폐들과 미신과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던 당시 에베소 시민들을 향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에베소라는 거대 국제도시에 복음으로 더 크게 영향을 끼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그 능력을 목도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소수의 사람들, 복음을 갈망하고 바른 복음과 전 복음을 알기를 갈망하던 소수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소개해 주고 그 이름 앞에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전 인생을 결단할 것을 도전했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에게 순종하라고 촉구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소수를 향한 개별 접촉 전략이, 무명에 가깝고 모자라고 부족해 보이는 ′제자 ′들을 만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략이, 대량전달과 다중 소비에 익숙하고 빠른 시간 안에 크고 놀라운 효과를 바라는 경제 개념에 익숙한 우리가 보기엔 미련해 보이고 효과나 영향력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굳이 바울은 에베소 사역의 시작을 소수의 무지하고 모자라고 부족해 보이는 ′제자 ′라는 사람들을 붙들고 시작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복음은 절대 사람의 숫자나 규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 사람도 지금 이 자리에서 선교사적 삶을 살아야 하는 사명이 있다. 주변을 돌아보라. 교회 안에 아직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모르거나, 한 번도 그분 앞에 죄를 총체적으로 고백한 적이 없거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적이 없거나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믿지 못하는 에베소의 12제자 같은 사람들은 없는지 찾아보라.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바울처럼 사랑의 질문을 통해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알아내고 그들의 가장 절실한 갈망과 필요를 채워주는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에베소의 12제자가 후일 에베소 교회의 중추적 리더 들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그런 에베소의 12제자들을 찾아 바른 복음으로 참 복음으로 ˝진짜 제자들˝을 세우길 원하신다. 그게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선교사의 삶을 사는 방법이다.